-주변인, 한계인
-떠날 수 있는 자 혹은 꿈꿀 수 있는 자
나는 이 자초지종을 완전히 생각할 능력이 없다.
발가벗은 채 비참하기 그지없는 이 사래의 한기를 쐬며, 현세의 마차를 타고,
초현세의 말들에게 끌려서 늙은 나는, 끝
도 없이 돌고 또 돌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시골의사>
삶은 의문부호로 가득찬 이상하고 다양하며 알수없는 세계이다.그러므로 답을 낼 수 없고
인식이나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중첩하고 현실과 비현실이
파편적인 피사체로 빙글빙글 회전하는 불가해한 세계 속에서 개인은 경계인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들 경계인의 내적 불안은 끝이 없으며 나는 그들의 불안한 꿈을 채집한다.
경계인: 꿈꾸지 않으면 살아 갈수가 없다
현실은 부조리하다. 나는 부조리한 현실을 사막으로, 사막과 확연한 혹은 모호한 경계를
이루는 바다를 다른 세계 즉 현실 너머의 세계인 이계(異界)로 상정한다.
playground라고 명명한 작품 속 부조리의 사막 안에서 서성거리는 어른도 아닌 아이도
아닌 미성숙한 존재들은 경계인이다. 현실에 익숙하고 리드해나가는 현실인 들과 대척점에
서있는 시대적 부적응자 들이며 현실인 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주변인들이다. 일상의 진부
함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그들의 불안의식은 끝이 없으며 그 내적 불안은 세계 속에 던져진
돌과 같은 세계내 존재조건에의 두려움이다. 그들이 부조리한 현실에서 견딜수 있는 힘은
상상속의 부유, 희원하는 다른 세계로의 내적 도피, 즉 꿈을 꾸는 것이다.
나의 작품에서 경계인들의 환영에는 동물들이 동승하여 출몰한다. 그들은 동물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동물을 매개로 하여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그들의 어설픈
시도로 말미암아 미미하다. 그들의 동물 되기 혹은 동물과 함께 함은 고립된 섬과 같은
경계인인 그들에게 입구 혹은 거울과 같다. 즉 그들이 희원하는 곳으로의 탈출구이자 소
통, 자아투영의 행위이다. 환영으로 출몰하는 동물들은 현실과 모호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피처인 비현실 세계로부터 온 서신이자 초대장이며 다리이다. 또한 이러한 동물들이
탈주의 수단과 소통을 제공하는 우애적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인 이유는 그들이
자아투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 경계인들이 내적 긴장과 불안의 이입대상으로
동물을 수단화 하는 환상적 시도는 인용한 바와같이 현세의 마차를 타고, 초현세의 말들
에게 끌려가는, 곧 현실속의 비현실적 여행이다.
시지프스적 경계인: 불을 든 아이
한편 작품속 불을 든 아이의 배치는 자각자(自覺者)의 상징이다. 불을 든 아이는 현실인들
의 세계에 편입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경계인들 가운데 현실의 부조리함과 경계인적 운명을
자각하고 수용한 자이다. 이들의 자각은 선불교에서 논하는 깨달음의 구조로 연장시킬 수
있다. 깨달음의 구조가 하나의 시간적 프레임과 공간적 프레임을 통과하는 영혼이 자각의
눈을 키워나가는 과정(Process)이라 할때 불을 들고 있는 아이의 행위는 자각의 눈을 띄어
나가는 여정, 즉 여행 이다. 그리고 현실과 내면의 불안을 직시하고자 그들이 든 노란 횃불은
그들의 상상력에서 발현된 삶의 근원적 힘이다.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는 부정을 긍정으로 도치시키는 용감한 시지프스를 보여준다.
현실이라는 부조리의 존재가 곧 자신의 존재임을 자각하는 시지프스는 굴려올리면 또다시
굴러내려오는 돌이라는 부조리를 자신과 일체화시키며 다시 시도한다.
이렇듯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경계인적 운명을 자각하고 자신의 근원적 힘인 횃불을 든
그들을 나는 시지프스적 경계인이라 개념화한다. 그들이 경계인적 상상력인 횃불을 들고
하는 자각을 위한 통과는 현실안의 철저한 자기 인식이자 내면으로의 몽환적 도피이며
꿈과 현실의 이음새 없는 결합이다. 결론적으로 구도적인 이들 여행자의 모습은 현실적
경계인들이 희구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자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 힘이다.
K군의 불온한 사적 기억 _ 3번째 개인전, 굿모닝신한갤러리
anti-nostalgia 추억은 그리움?
이것은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깜깜하고 긴 과거란 시간 터널에서 유독 눈부시게
선명해서 담요로 황급히 덮어버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 도둑고양이마냥 불쑥불쑥 현재에
끼여들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 시간이 본인에게 전혀 그리움의 대상이 못되고
오히려 망각되기를 원하는 시간이라면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추억은 곧 그리움이라는
일반적인 공식이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anti-nostalgia를 어떻게 바라보
아야 할지 생각해보게 되었고 면면히 그 시간의 나락들을 채집하여 재생하는 작업의
시작을 결정하였다.
유년기의 많은 부분을 보낸 골목이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가보니 골목은 휑하니
사라져 있었다. 사실 오래전에 이미 도시 계획으로 인해 그 자리에 큰 도로가 생기면서
골목이 사라 졌다는걸 알았다. 처음 그것을 인지했을 때도 나는 조금 놀랐을 뿐 슬프거나
아쉬움 따위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골목의 말없는
돌담과 시멘트길, 주목받지 못하는 후즐그레한 나무들과 가물거리지만 어떤 한 표정들
만큼은 선명히 남아있는 사람들과 같이 보낸 그 시간도 사라지길 말이다. 나에게 그 공간
은 당연히 사라져야 할 구습과도 같은...,어쩌면 시든 야채더미가 쌓여있는 온상과도 같은
것 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시간의 주는 망각이라는 선물을 원했고 그것
에 감사하면서 그 효력이 영원할거라 믿었다.
하지만 최근 우연한 만남으로 기억속에 희미하게 봉했던 시간을 대면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그 골목이 되살아나면서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기억의 파편들이
나를 불편케했다. 그러한 공격너머로 걸어오는 낯선 아이가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
아이의 작은눈안에는 불만과 무료함과 호기심으로 가득차 보였고 유달리 외로워 보였
다. 가만히 보니 그 아이는 나를 닮은 아이였다.
아득하면서도 문득문득 서슬퍼런 칼날같이 선명한 그 시간도 막을수없는 세월의 힘으로
그리움이라는 덧칠이 칠해져 있을거라 내심 믿었었다. 적어도 누구나 그러하듯이 유년
기의 기억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여전히 불온하게 다가왔다. 해부 후
에도 펄떡펄떡 뛰는 개구리의 심장처럼 당혹스러운 그 시간은 세월의 흐름에도 전혀
그리움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조우 이후로 적지않게 불편해진 나는 텁텁
한 유년기의 그 골목 안으로 발을 내딛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듯 투명한
기억의 첫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고작 이것은 앞으로의 긴
여행의 초입이자 출발일 뿐이다.